
처음 만난 사람과 악수를 한다. 말은 다 맞는데 어딘가 불편하다. 근거를 못 대니 넘긴다. 계약서를 읽다가 한 문장에서 눈이 멈춘다. 설명을 들으니 문제없다고 한다. 서명한다. 앞차가 어딘가 불안하다. 괜히 예민한가 싶어 속도를 그대로 둔다. 그 차가 갑자기 차선을 바꾼다. 아이가 괜찮다고 한다. 말은 괜찮다는데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. 괜찮다니까 그냥 둔다. 투자 설명을 듣는다. 숫자는 다 맞는다. 그런데 속이 불편하다. 숫자를 믿고 넣는다.
다섯 장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. 먼저 온 느낌이 있었다. 근거를 못 댄다는 이유로 그 느낌을 버렸다. 회의실에서는 더 그렇다. 느낌이 그렇다고 말하면 진다. 근거를 대라는 말 한마디에 밀린다. 집에서도 같다. 그냥 싫다고 하면 왜냐는 말이 돌아온다. 그래서 다들 설명할 수 있는 쪽으로 손을 든다. 설명이 되는 답이 늘 맞는 답은 아닌데도 그렇다.
그런데 그 느낌은 어디서 왔을까. 김주환은 『내면소통』에서 이렇게 썼다.
“인간의 내장에는 수많은 감각세포가 분포되어 있으며 내장에서 뇌로 올라가는 정보의 양이 뇌에서 내장으로 내려오는 정보의 양보다 훨씬 더 많다.”
내장은 음식을 소화하는 기관일 뿐 아니라, 팽창과 움직임, 영양 상태, 호르몬·면역 신호처럼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뇌에 알리는 감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. 미주신경을 이루는 섬유 가운데는 장기에서 뇌로 정보를 전달하는 감각성 섬유가 약 80~90%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. 영어에서 직감을 gut feeling, 즉 ‘배 속에서 느끼는 감각’이라고 부르는 데에도 이런 몸의 신호와 정서·판단의 연결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.
실험도 있다. 1997년 안토니오 다마지오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이른바 ‘아이오와 도박 과제’를 수행하게 했다. 참가자들은 네 묶음의 카드 중에서 한 장씩 골랐고, 어떤 묶음은 당장은 큰 보상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손실을 안겼다.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어느 카드 묶음이 불리한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전부터, 불리한 묶음을 고르기 직전에 더 큰 피부전도 반응, 곧 긴장과 각성의 생리적 반응이 나타나는 경향을 관찰했다. 또한 참가자들은 명시적 규칙을 충분히 설명하기 전에 점차 더 유리한 묶음을 선호하기 시작했다.
이 결과는 우리가 판단할 때 논리적 설명만 쓰는 것이 아니라, 이전 경험에서 쌓인 몸의 반응과 정서적 신호도 함께 사용한다는 ‘체화된 판단’의 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. 다만 이를 “몸이 언제나 이성보다 먼저, 더 정확하게 안다”는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. 후속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이 말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더라도, 과제의 손익 구조에 관한 일부 의식적 지식이나 막연한 예감을 이미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됐다. 그러므로 직감은 무조건 따를 정답이 아니라 무슨 신호가 왔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게 하는 첫 번째 단서에 가깝다.
그 일을 오래 해 온 사람의 직감은 없는 데서 오지 않는다. 본 것이 쌓여 말보다 먼저 나온 것이다. 나 같은 수의사도 그렇다. 검사 수치가 다 정상인데 이 아이는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. 근거를 대라면 쉽게 못 댄다. 그런데 그냥 무시할 감이 아니다. 20년 가까이 본 수천 번이 몸에 남아 먼저 나온 직감이다.
다시 말하지만 직감이 늘 맞지는 않는다. 무엇보다 겪어 본 적 없는 분야의 직감은 정보가 아니라 편견에 가깝다. 오래 본 사람의 감과 처음 본 사람의 감은 같은 말이 아니다.
그래서 필요한 건 믿는 것도 버리는 것도 아니다. 남겨 두고 맞춰 보는 것이다.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건 하나다. 넘기기 전에 한 번만 묻는 것. 나는 무엇을 보고 이런 느낌이 들었나. 그리고 그 답을 남긴다. 표정이었는지, 문장 하나였는지, 말의 속도였는지. 몇 달 뒤 결과를 그 옆에 붙인다. 그러면 내 직감이 어느 자리에서 맞고 어느 자리에서 틀리는지 보인다. 사람을 볼 때는 맞고 돈을 볼 때는 틀리는 식이다. 그때부터 직감은 기분이 아니라 자료가 된다.
지난 회에 나는 빨리 나온 답을 의심하라고 썼다. 이번 글은 반대로 들릴 것이다. 가르는 기준은 하나다. 그 판단이 남에게서 받은 규범에서 왔는지, 내가 오래 직접 본 것에서 왔는지. 앞의 것이면 의심하고 뒤의 것이면 남겨 둔다.
최근에 근거를 못 대서 넘긴 느낌이 하나 있을 것이다. 그 느낌은 무엇을 보고 온 것인가.
[박근필]
그로쓰 퍼실리테이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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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근필성장연구소장, 수의사, 작가, 칼럼니스트,
강연가, 커리어 스토리텔러
저서 : <할퀴고 물려도 나는 수의사니까>
<나는 매일 두 번 출근합니다>
<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>
<방구석에서 혼자 읽는 직업 토크쇼>(공저)
<당신의 원고는 왜 계약되지 않는가>
독저팅, 필레터 운영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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